[제3회 세종 서산부인과 글쓰기 대회] 1등 당선작 최○연 / 진짜 슈퍼맨은 머리 다듬을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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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 산부인과 작성일 25-08-04 15:11 조회 76회 댓글 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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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세종 서산부인과 글쓰기 대회] 1등 당선작 최○연 / 진짜 슈퍼맨은 머리 다듬을 시간이 없다.
진짜 슈퍼맨은 머리 다듬을 시간이 없다.
임신 3개월쯤이었나.
어느 오후, 1진료실 앞에서 이경아 원장님을 기다리는 날이었다. 예약 시간이 한참 지나있었고, 진료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진료 대기 환자 목록에는 내 이름 위로 몇 명이 더 있었다. 모두 소파에 앉아 차분하게 당신 차례를 대기 중이었다.
무슨 일이지? 나만 모르는 일이 있나? 성미 급한 한국인답게 의아함과 조바심이 나던 차였다. 어딘가에서 이 원장님이 나타났다. 발이 천근만근 무거운 듯 슬리퍼가 바닥에 질질 끌리는 소리, 늘 하나로 질끈 묶으신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모양새. 피곤함이 가득한 기색으로 이 원장님은 진료실로 들어갔다.
가만히 앉아 기다리느라 좀이 쑤시다 못해 불만족스럽게 튀어나왔던 입이 제자리를 찾았다. 몇 분 지나지 않아 1진료실에서 사람들을 호출했고, 나 역시 곧 진료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차분한 목소리와 대조되는 머리카락 몇 움큼이 원장 쌤 머리 위로 삐죽빼죽 튀어나온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한 달이 지난 즈음, 한 차례 몰려온 입덧 탓에 잘 먹지 못했고 이 원장님은 탈수를 걱정하며 수액 처방을 해주셨다. 간호사 선생님이 비용 결제를 하시며 말했다. “3층 입원실로 가서 벨 누르세요.” 3층? 벨이요? 그땐 비상계단이 어디 있는 줄도 몰라 그냥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층을 내려갔다.
3층에 내리니 4층 진료실과는 딴판으로 정적인 복도가 나타났다. 망설이다 누른 벨소리는 컸고 수액 바늘은 아팠다. 입원실 한편에 누워 있는 중, 멀지 않은 곳에서 신음이 들려왔다. 으으윽- 으으으으윽-!!!!! 수액 투여가 잘 되고 있는지 확인하러 온 간호사분이 내 표정을 보고 웃었다.
“산모님도 몇 달 있으면 저렇게 하셔야 해요.” 몇 개월 뒤 저기에 내가 누워서 똑같이 신음하고 있을 것을 상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수액 한 번 맞으러 왔다가 분만 현장 소리 중계를 들으며 누워있는 나의 신세란…. 몇 개월 뒤 저기에 누워서 똑같이 신음할 나를 상상하니 무척 심란했다.
의료진의 목소리가 웅얼웅얼, 산모의 신음 아래로 뭉개졌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순간, 번쩍, 머릿속에 두서없이 늘어져 있던 퍼즐 조각이 착착 맞춰졌다.
오랫동안 진료를 기다려야 했던 그날, 이 원장님은 3층에서 분만을 하고 올라오는 길이었구나!
그제야 다른 병원과는 다른, 산부인과만의 광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산부인과 외래진료 대기실에는 월화수목금토, 평일을 넘어 주말까지 사람들이 가득했다. 가끔은 여섯 줄로 늘어선 소파가 모자라 서 있는 사람도 있었다. 뉴스에서 떠드는 것처럼 역시 세종은 출산율이 높네- 혹은, 서산부인과 원장님들이 좋다더니 역시 인기가 많은 병원이구먼-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조금만 찬찬히 둘러보니, 대기실에 앉은 사람은 여자만이 아니었다. 남녀노소가 섞여 있었다. 산모 한 명만 내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나 친정엄마 같은 보호자, 심지어는 아이 한 명을 대동하기도 해서 그랬다. 나부터도 진료를 받으면서 혼자 내원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이러니 사람이 바글바글 많을 수밖에 없지.
일전에 겪었던 것처럼 예약했음에도 1진료실의 문이 약간 열린 채로 이 원장님의 진료가 밀리던 때도, 대기가 밀리다 못해 다른 선생님께 진료를 안내받을 때도 있었다. 지하 주차장은 늘 만차였고, 3층에서는 세탁물이나 식기류를 실은 카트를 미는 직원분이 엘리베이터에 타실 때가 있었다.
진료 대기 공간에는 백색소음처럼 자근자근 목소리가 깔려 있었다. 물론 경우가 다양하고 모든 이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는 종종 기대감이나 설렘, 경이가 가득한 목소리가 공기를 채우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파서 가는 병원에서 설렐 일이 뭐가 있을까? 두렵고 아프기만 한 곳이 아니라, 갈 날이 손꼽아 기다려지는 병원. 전에 겪어본 적 없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곳. 산부인과는 그런 곳이었다.
임신 기간 내내 나는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분이 들면 호들갑을 떨며 병원을 달려갔다. 그럴 때마다 이 원장님은 한결같은 차분한 목소리로 달래주셨다. 이 원장님이 “아기는 잘 크고 있어요.”라고 해주실 때마다, 가본 적 없는 임신-출산의 길을 걸어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어두컴컴한 정밀 초음파실은 정말 설레는 방이었다. 세상에 없던, 이제 뿅 생겨나고 있는 아기를 좀 더 가까이 만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초음파 선생님은 초음파 기기로 능숙하게, 꼼꼼하게 배를 어루만지다가 아기가 씨익 웃는 모습을 포착하시고는 탄성을 질렀다.
“보셨어요?” 정작 엄마인 나는 너무 순식간에 지나간 탓에 네에- 하고 말았는데, 선생님은 본인이 더 신나서 영상을 되감아 계속 보여주셨다. 너무 귀엽죠? 너무 귀엽죠? 선생님도 나도 화면 속 아기도 방긋방긋 웃었다.
약속했던 유도분만 날 새벽, 3층 문 앞에 섰다. 수액 맞은 뒤로 첫 방문이었다. 역시나 4층 외래와는 딴판으로 정적인 복도가 나타났다. 병원이니 쥐새끼가 있으면 안 되는 건 당연하지만, 정말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 번 와봤던 덕인지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게다가 남편이 든든하게 옆을 지키고 있었으니,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에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벨을 눌렀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조금 피곤한 얼굴을 한 간호사 한 분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다음부터는 익숙했다. ‘서산부인과 유도분만’ 후기를 있는 대로 다 읽고 갔기 때문이다.
옷을 갈아입고 입원실 침상에 누워 이런저런 검사와 조치를 하니 두 시간이 흘렀고, 이후 이 원장님의 설명을 들었다. 그게 오전 9시 8분. 4층 외래진료실의 이 원장님 방문은 그때처럼 살짝 열려 있을까? 아침부터 대기 환자가 많겠지? 옥시토신을 맞기 시작할 때 간호사 한 분이 남편과 대화를 나누는 나의 미소를 보며 아직은 여유가 넘친다며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가벼운 농담을 건네었다.
별로 아프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양수가 터지고, 서서히 진통이 강해졌다. 연습해 온 호흡법은 감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직도 자궁문이 거의 안 열렸다고요? 온몸이 비틀렸다. 이 원장님은 내일 계속 해 볼 수도 있지만, 진행이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하셨다.
“좀 더 생각해 본 다음 말씀드려도 될까요?” 한 시간 더 있었나, 도저히 견디지 못할 수준에 이르러 결국 수술을 결정했다. 수술 준비는 일사천리였다. 남편은 입원실 문밖으로 퇴장당했다. 쥐어뜯고 있던 남편 손이 없어지자, 모든 게 두려워졌다.
그러자 곁으로 다가오신 마취과장님이 말을 걸어주셨다. “고생 많았죠? 이제 안 아플 거예요.” 과장님, 과장님 등 뒤로 날개가 보여요…. 수술대 위로 올라가기 전, 아니 그 이후에도 직원들은 계속 내게 말을 걸며 마음을 다독여주셨다.
통증이 없어진 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척추에 약을 꽂고 하반신이 마취되면서였겠지만, 내 주위를 둘러싸고 분주히 움직이며 나를 지키는 수호천사들 같은 의사 쌤과 간호사 쌤들 덕분이기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짠-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이 원장님! 하반신이 덜렁덜렁 흔들리는 기분이 저 멀리서 아득하게 느껴지는 듯했고, 얼마 안 있어 간호사분들이 웃었다. “야, 너 왜 안 울어? 울어야 해.” 뱃속에서 잘 놀고 있던 아기는 세상에 끄집어내진 것이 황당한 모양이었는지, 나오자마자 울지 않고 눈을 껌뻑이고 있었단다. 그러다 으엥, 하고 아기가 울었다. 마취과장님은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셨다.
간호사분들은 항생제며 페인부스터며 각종 줄을 주렁주렁 달고 입원실에 누운 나를 수시로 체크하러 오셨다. 까끌한 얼굴을 한 건 환자인 나뿐만이 아니었다. 새벽, 아침, 점심, 저녁, 밤, 그리고 다시 새벽. 계속 혈압을 잰다고 팔뚝에는 자잘한 피멍이 들었고 수액이 들어가는 손이 금방 부어서 양팔을 번갈아 주삿바늘을 꽂아야 했는데, 간호사 한 분이 내 팔에 덕지덕지 붙은 지혈 스티커와 유도분만 당시 항생제 테스트를 한 펜 자국을 만지작거리며 말씀하셨다. “치열했네요.”
모유 수유 교육 겸 가슴 관리를 해주시던 간호과장님은 아픈 걸 정말 잘 참는다며, 오죽 진통이 아팠으면 수술해야 했을까 싶다고, 너무 고생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자연분만을 위해 진통을 더 참아야 했나 싶어 죄책감이 들고 있던 차에 위로가 되는 말들에 코끝이 찡해졌다. 간호사분들은 어느 하루 혼자 신생아실을 독차지하게 된 우리 아기를 VIP라고 부르며 웃었다.
그렇게 이 원장님은 물론, 많은 의료진분과 함께한 감사한 순간들이 모여 작고 반짝이는 생명 하나가 지구에 도착했다. 아니, 그곳에서는 아기 하나만 태어난 게 아니라 부모도 태어났다. 수액을 맞으러 갔다가 분만 현장을 접한 그날에도 그랬다.
수액을 맞던 방문 앞에는 작고 낮은 소파가 하나 있었다. 그곳에는 남자 하나가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내가 수액을 맞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났을까, 신음하던 산모가 엉엉 울음을 터뜨렸고, 뒤이어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었다. 아기 아빠, 탯줄 자르러 들어오세요.
간호사의 부름에 분만실로 들어갔다 나온 남자는 내 방문 밖 소파로 돌아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작은 아기 하나가 인생 처음으로 연약한 울음소리를 내자, 커다란 어른 남자가 뒤따라 눈물을 흘리는 곳. 아마 그 남자는 아기와 처음 만난 감격의 순간, 아기의 안녕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다짐하지 않았을까? 내가 내 아기를 처음 만난 순간은 그랬기 때문에.
품에 안은 달큰한 아기 살냄새를 맡다 보니, 나는 내 아기가 살 세계의 평화를 비는 사람이 되었다. 나의 아기가 곧 그럴 것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거리를 뛰어다니고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 모두 슬픈 일이 없기를 바라게 되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한때는 내 아기처럼 작고 연약했을 것을 상상하니 싫어하기가 힘들어졌다. 신생아 하나가 세상을 향한 부모의 시선을 바꾼다. 밤낮도 주말도 없이 산부인과를 지키는 이들이 있기에 가능한 변화다. 영어로 ‘분만시키다’는 ‘배달하다,’ ‘인도하다’와 똑같이 deliver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산부인과 의료진의 숭고한 역할은 더없이 분명해진다.
그들은 오늘과 내일, 모레, 계속해서 또 다른 아기들을 세상에 데려올 것이고, 그로써 우리는 어른이 된다.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들과 간호사 선생님들, 우리들의 슈퍼맨은 옷매무새, 머리칼을 가다듬을 새 없이 우리네 인생을 설레는 내일로 이끌어주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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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지? 나만 모르는 일이 있나? 성미 급한 한국인답게 의아함과 조바심이 나던 차였다. 어딘가에서 이 원장님이 나타났다. 발이 천근만근 무거운 듯 슬리퍼가 바닥에 질질 끌리는 소리, 늘 하나로 질끈 묶으신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모양새. 피곤함이 가득한 기색으로 이 원장님은 진료실로 들어갔다.
가만히 앉아 기다리느라 좀이 쑤시다 못해 불만족스럽게 튀어나왔던 입이 제자리를 찾았다. 몇 분 지나지 않아 1진료실에서 사람들을 호출했고, 나 역시 곧 진료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차분한 목소리와 대조되는 머리카락 몇 움큼이 원장 쌤 머리 위로 삐죽빼죽 튀어나온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한 달이 지난 즈음, 한 차례 몰려온 입덧 탓에 잘 먹지 못했고 이 원장님은 탈수를 걱정하며 수액 처방을 해주셨다. 간호사 선생님이 비용 결제를 하시며 말했다. “3층 입원실로 가서 벨 누르세요.” 3층? 벨이요? 그땐 비상계단이 어디 있는 줄도 몰라 그냥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층을 내려갔다.
3층에 내리니 4층 진료실과는 딴판으로 정적인 복도가 나타났다. 망설이다 누른 벨소리는 컸고 수액 바늘은 아팠다. 입원실 한편에 누워 있는 중, 멀지 않은 곳에서 신음이 들려왔다. 으으윽- 으으으으윽-!!!!! 수액 투여가 잘 되고 있는지 확인하러 온 간호사분이 내 표정을 보고 웃었다.
“산모님도 몇 달 있으면 저렇게 하셔야 해요.” 몇 개월 뒤 저기에 내가 누워서 똑같이 신음하고 있을 것을 상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수액 한 번 맞으러 왔다가 분만 현장 소리 중계를 들으며 누워있는 나의 신세란…. 몇 개월 뒤 저기에 누워서 똑같이 신음할 나를 상상하니 무척 심란했다.
의료진의 목소리가 웅얼웅얼, 산모의 신음 아래로 뭉개졌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순간, 번쩍, 머릿속에 두서없이 늘어져 있던 퍼즐 조각이 착착 맞춰졌다.
오랫동안 진료를 기다려야 했던 그날, 이 원장님은 3층에서 분만을 하고 올라오는 길이었구나!
그제야 다른 병원과는 다른, 산부인과만의 광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산부인과 외래진료 대기실에는 월화수목금토, 평일을 넘어 주말까지 사람들이 가득했다. 가끔은 여섯 줄로 늘어선 소파가 모자라 서 있는 사람도 있었다. 뉴스에서 떠드는 것처럼 역시 세종은 출산율이 높네- 혹은, 서산부인과 원장님들이 좋다더니 역시 인기가 많은 병원이구먼-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조금만 찬찬히 둘러보니, 대기실에 앉은 사람은 여자만이 아니었다. 남녀노소가 섞여 있었다. 산모 한 명만 내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나 친정엄마 같은 보호자, 심지어는 아이 한 명을 대동하기도 해서 그랬다. 나부터도 진료를 받으면서 혼자 내원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이러니 사람이 바글바글 많을 수밖에 없지.
일전에 겪었던 것처럼 예약했음에도 1진료실의 문이 약간 열린 채로 이 원장님의 진료가 밀리던 때도, 대기가 밀리다 못해 다른 선생님께 진료를 안내받을 때도 있었다. 지하 주차장은 늘 만차였고, 3층에서는 세탁물이나 식기류를 실은 카트를 미는 직원분이 엘리베이터에 타실 때가 있었다.
진료 대기 공간에는 백색소음처럼 자근자근 목소리가 깔려 있었다. 물론 경우가 다양하고 모든 이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는 종종 기대감이나 설렘, 경이가 가득한 목소리가 공기를 채우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파서 가는 병원에서 설렐 일이 뭐가 있을까? 두렵고 아프기만 한 곳이 아니라, 갈 날이 손꼽아 기다려지는 병원. 전에 겪어본 적 없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곳. 산부인과는 그런 곳이었다.
임신 기간 내내 나는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분이 들면 호들갑을 떨며 병원을 달려갔다. 그럴 때마다 이 원장님은 한결같은 차분한 목소리로 달래주셨다. 이 원장님이 “아기는 잘 크고 있어요.”라고 해주실 때마다, 가본 적 없는 임신-출산의 길을 걸어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어두컴컴한 정밀 초음파실은 정말 설레는 방이었다. 세상에 없던, 이제 뿅 생겨나고 있는 아기를 좀 더 가까이 만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초음파 선생님은 초음파 기기로 능숙하게, 꼼꼼하게 배를 어루만지다가 아기가 씨익 웃는 모습을 포착하시고는 탄성을 질렀다.
“보셨어요?” 정작 엄마인 나는 너무 순식간에 지나간 탓에 네에- 하고 말았는데, 선생님은 본인이 더 신나서 영상을 되감아 계속 보여주셨다. 너무 귀엽죠? 너무 귀엽죠? 선생님도 나도 화면 속 아기도 방긋방긋 웃었다.
약속했던 유도분만 날 새벽, 3층 문 앞에 섰다. 수액 맞은 뒤로 첫 방문이었다. 역시나 4층 외래와는 딴판으로 정적인 복도가 나타났다. 병원이니 쥐새끼가 있으면 안 되는 건 당연하지만, 정말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 번 와봤던 덕인지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게다가 남편이 든든하게 옆을 지키고 있었으니,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에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벨을 눌렀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조금 피곤한 얼굴을 한 간호사 한 분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다음부터는 익숙했다. ‘서산부인과 유도분만’ 후기를 있는 대로 다 읽고 갔기 때문이다.
옷을 갈아입고 입원실 침상에 누워 이런저런 검사와 조치를 하니 두 시간이 흘렀고, 이후 이 원장님의 설명을 들었다. 그게 오전 9시 8분. 4층 외래진료실의 이 원장님 방문은 그때처럼 살짝 열려 있을까? 아침부터 대기 환자가 많겠지? 옥시토신을 맞기 시작할 때 간호사 한 분이 남편과 대화를 나누는 나의 미소를 보며 아직은 여유가 넘친다며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가벼운 농담을 건네었다.
별로 아프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양수가 터지고, 서서히 진통이 강해졌다. 연습해 온 호흡법은 감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직도 자궁문이 거의 안 열렸다고요? 온몸이 비틀렸다. 이 원장님은 내일 계속 해 볼 수도 있지만, 진행이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하셨다.
“좀 더 생각해 본 다음 말씀드려도 될까요?” 한 시간 더 있었나, 도저히 견디지 못할 수준에 이르러 결국 수술을 결정했다. 수술 준비는 일사천리였다. 남편은 입원실 문밖으로 퇴장당했다. 쥐어뜯고 있던 남편 손이 없어지자, 모든 게 두려워졌다.
그러자 곁으로 다가오신 마취과장님이 말을 걸어주셨다. “고생 많았죠? 이제 안 아플 거예요.” 과장님, 과장님 등 뒤로 날개가 보여요…. 수술대 위로 올라가기 전, 아니 그 이후에도 직원들은 계속 내게 말을 걸며 마음을 다독여주셨다.
통증이 없어진 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척추에 약을 꽂고 하반신이 마취되면서였겠지만, 내 주위를 둘러싸고 분주히 움직이며 나를 지키는 수호천사들 같은 의사 쌤과 간호사 쌤들 덕분이기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짠-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이 원장님! 하반신이 덜렁덜렁 흔들리는 기분이 저 멀리서 아득하게 느껴지는 듯했고, 얼마 안 있어 간호사분들이 웃었다. “야, 너 왜 안 울어? 울어야 해.” 뱃속에서 잘 놀고 있던 아기는 세상에 끄집어내진 것이 황당한 모양이었는지, 나오자마자 울지 않고 눈을 껌뻑이고 있었단다. 그러다 으엥, 하고 아기가 울었다. 마취과장님은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셨다.
간호사분들은 항생제며 페인부스터며 각종 줄을 주렁주렁 달고 입원실에 누운 나를 수시로 체크하러 오셨다. 까끌한 얼굴을 한 건 환자인 나뿐만이 아니었다. 새벽, 아침, 점심, 저녁, 밤, 그리고 다시 새벽. 계속 혈압을 잰다고 팔뚝에는 자잘한 피멍이 들었고 수액이 들어가는 손이 금방 부어서 양팔을 번갈아 주삿바늘을 꽂아야 했는데, 간호사 한 분이 내 팔에 덕지덕지 붙은 지혈 스티커와 유도분만 당시 항생제 테스트를 한 펜 자국을 만지작거리며 말씀하셨다. “치열했네요.”
모유 수유 교육 겸 가슴 관리를 해주시던 간호과장님은 아픈 걸 정말 잘 참는다며, 오죽 진통이 아팠으면 수술해야 했을까 싶다고, 너무 고생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자연분만을 위해 진통을 더 참아야 했나 싶어 죄책감이 들고 있던 차에 위로가 되는 말들에 코끝이 찡해졌다. 간호사분들은 어느 하루 혼자 신생아실을 독차지하게 된 우리 아기를 VIP라고 부르며 웃었다.
그렇게 이 원장님은 물론, 많은 의료진분과 함께한 감사한 순간들이 모여 작고 반짝이는 생명 하나가 지구에 도착했다. 아니, 그곳에서는 아기 하나만 태어난 게 아니라 부모도 태어났다. 수액을 맞으러 갔다가 분만 현장을 접한 그날에도 그랬다.
수액을 맞던 방문 앞에는 작고 낮은 소파가 하나 있었다. 그곳에는 남자 하나가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내가 수액을 맞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났을까, 신음하던 산모가 엉엉 울음을 터뜨렸고, 뒤이어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었다. 아기 아빠, 탯줄 자르러 들어오세요.
간호사의 부름에 분만실로 들어갔다 나온 남자는 내 방문 밖 소파로 돌아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작은 아기 하나가 인생 처음으로 연약한 울음소리를 내자, 커다란 어른 남자가 뒤따라 눈물을 흘리는 곳. 아마 그 남자는 아기와 처음 만난 감격의 순간, 아기의 안녕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다짐하지 않았을까? 내가 내 아기를 처음 만난 순간은 그랬기 때문에.
품에 안은 달큰한 아기 살냄새를 맡다 보니, 나는 내 아기가 살 세계의 평화를 비는 사람이 되었다. 나의 아기가 곧 그럴 것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거리를 뛰어다니고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 모두 슬픈 일이 없기를 바라게 되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한때는 내 아기처럼 작고 연약했을 것을 상상하니 싫어하기가 힘들어졌다. 신생아 하나가 세상을 향한 부모의 시선을 바꾼다. 밤낮도 주말도 없이 산부인과를 지키는 이들이 있기에 가능한 변화다. 영어로 ‘분만시키다’는 ‘배달하다,’ ‘인도하다’와 똑같이 deliver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산부인과 의료진의 숭고한 역할은 더없이 분명해진다.
그들은 오늘과 내일, 모레, 계속해서 또 다른 아기들을 세상에 데려올 것이고, 그로써 우리는 어른이 된다.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들과 간호사 선생님들, 우리들의 슈퍼맨은 옷매무새, 머리칼을 가다듬을 새 없이 우리네 인생을 설레는 내일로 이끌어주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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